마키아벨리 군주 5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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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 군주 5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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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11

 

마키아벨리 군주 500년

 

 

책장에서 낡은 책을 다시 꺼내 들었다. 청년기에 몇 번을 들여다봐도 이해할 수 없는 단어들의 나열로 짜증났던 기억이 전부인 '군주론'은 이미 누렇게 퇴색돼 있었다. 세상을 좀 살았다고 자부한 40대에 다시 접한 시오노 나나미의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도 명쾌한 해답을 던져주진 못했다. 마키아벨리의 고향은 피렌체에서 얼마가 떨어져 있고 그의 친구 베트리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은 어떻고 실직한 그가 우울증에 걸려 방황했다는 골목 스케치 등 시시콜콜함이 너무 장황해 또 덮어 버렸다. 친해지고 싶었지만 소득이 별로 없었던 만남이었다. 그런 마키아벨리를 다시 찾은 것은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올해는 그가 군주론을 써낸 시점으로부터 500년이 되었다는 점, 군주론은 목적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라는 음흉하고 비열한 권모술수의 교본이 아니라 사실은 인간을 중심으로 그 정교한 변화를 추적해낸 저술이라는 점, 그의 주장대로 때로는 선동보다는 침묵이, 강력한 지배보다는 소극적인 비지배가 지금 우리가 지향하고 있는 민주공화정의 나아갈 방향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는 점 등이 매력 있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만큼 내 자신에 세상의 때가 묻은 것도 큰 이유일 수 있다.

역사상 아무도 그의 천재성을 따를 수 없다고 치켜세워져 오는 마키아벨리는 1469년 태어났다. 피렌체 시골뜨기로 대학도 나오지 않았고 중키에 작은 대머리, 용모도 빈상으로 누가 봐도 비호감이다. 거동은 경망해서 무게와는 거리가 멀었다. 실수를 예사로 저지르고 치밀하지 못했으며 놀기를 좋아해서 젊은 제자들과 어울려 법석을 떨고 이가 우글거리는 창녀와 잠잔 이야기를 친구에게 소상하게 적어 보내는 주책이었다. 이 같은 마키아벨리에 대해 웬만하면 사람들이 미간을 찌푸릴 만도 한데 오늘날까지 멀쩡하게 추앙 받고 있고 다시 '군주론 집필 500년' 행사의 주인공으로 부활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군주론 15장부터 19장을 보면 애정보다는 공포가, 조화보다는 갈등이, 정직만큼이나 기만이 시민적 자유와 공공선의 실현을 위한 밑거름이 될 수 있다고 썼다. 직선적으로만 보면 이기적인 인간본성과 힘에 대한 찬양이다. 권력을 꿈꾸는 사람들에게는 위험한 도구다. 도덕과 비도덕의 경계너머에 있는 정치라는 치명적 위험이 바이블로 삼을 가능성이 높다. 처세나 경영전략에서 본다면 오히려 덜 위험해 보인다. 민주사회에서 마키아벨리의 힘의 통찰은 조심스럽다. 다수의 의사가 곧 힘이 되는 사회에서 힘에 대한 과신은 소수와 소외된 사람들을 제물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역설적으로 힘에 대한 솔직한 성찰을 원하는 사람들의 교양이 되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소수의 탁월함보다는 다수의 상식이 나은 결정을 내린다고 보는 시민들의 논거, 혹은 다양성과 갈등의 유효성을 인정하면서도 갈등을 치유하고 공공선을 실현시킬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던 게 그 시대 마키아벨리의 시각이었던 같다. 안정적이지만 답답한 피렌체나 베네치아가 아니라 소란했지만 강력했던 로마로 돌아가고자 했던 사고의 흔적과 함께.

군주론을 뒤적이다 보면 이 책은 누구에게나 쓸모 있는 내용을 전하려 했던 것이지 군주의 행동요령만을 기술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정치와 권력에 대해 우리가 불편하게 느꼈던 진실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 사람 사는 세상에 이 둘은 분리할 수 없는 숙명이므로. 해석해보면 그가 실천하지 못하고 지나친 과오를 자유인 누구나가 할 수 있다는 자기 고백서로 보아도 무방하다. 정치로 돌아가면 어떤 방식으로 권력을 잡았든 인민의 지지가 필수적이라는 말은 권위의 행사와 힘의 행사를 착각하는 오늘날 정치지도자들에게 죽비 같은 꾸짖음이다.

'강론'을 통해 그는 공화정의 다수가 비지배를 꿈꿀 때 시민적 자유와 시민적 품위가 함께 보장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개인과 귀족의 이분법적 논리보다 현실정치의 차분함이나 욕망과 실수가 버무려진 인간사회에 대한 통찰이 치밀하다. 다수가 정치에 참여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오히려 지배 받지 않고자 하는 것이 기본적 인간심성임을 잘 간파하고 있다.

세상 사람들은 군주론을 주로 기억하지만 '정략론' 역시 이에 못지 않다. 군주론은 복직의 소원을 담아 메디치가의 젊은 실력자 로렌초에 바쳐졌지만 '정략론'은 자신보다 20살 아래인 코시모 루첼라이와 자노비 본텔몬티 등 네 청년들의 전략적 교본으로 보내졌다.

막스베버의 표현을 빌리면 아직은 권력을 맛보지 않은 잠재적 참주 즉 청년들에게 권력과 권위의 차이, 지배와 통치의 이해를 설명했다. 이탈리아의 전설적인 용병대장 콜론나와의 인터뷰형식으로 그려낸 내용들이 인상적이다. 일차적으로는 상대의 복종 또는 순종을 얻어내는 비대칭적이고 불평등한 힘의 우위를 꿈꾸는 청년들에게 시민적 자유가 보장된 제도의 설립과 유지가 진정한 영광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설득한 점. 젊고 야심에 찬 그들이 권력만을 지향하는 참주의 길을 선택하지 않고 시민의 자유를 위해 헌신하도록 이끌려고 노력했던 모습은 새로운 울림이다.

이탈리아의 대문호 알베르트 모라비아는 "우선 군주론을 읽고 글 쓰는 사람으로서의 그의 문장력에 감탄한다. 그 힘은 운동선수의 근육 하나하나가 피부아래 있으면서도 떠오르는 것과 같다. 합리적인 동시에 기발하고 논리적인 동시에 정열이 넘치고 엄밀한 동시에 감동이 밀려온다" 고 높은 평점을 주었다.

마키아벨리의 진정한 메시지는 휘두르고 싶은 욕망을 자제하고 공존하는 자세를 역설한 것이다. 사회적 구조와 계급에 주목했던 마르크스의 식상함에서 벗어나고 싶은 우리사회 지식인들에게 그는 살아있는 사람을 주제로 움직이는 권력을 관찰해냈다. 세력과 구조를 만드는 주체가 살아있는 사람들이므로 정치에 사람이 들어갈 때 비로소 생명이 돈다. 그런 생물체적 관점에서 한쪽이 다른 쪽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한계를 설정하고 어떤 노력이 있어야 하는지를 해부한 탁견이 백미다.

그렇다고 그는 위대한 사상가도 엄청난 정치가도 아니었다. 관직을 하다 쫓겨나고 복직을 꿈꾸다가 실망하고 결국은 모든 것을 포기한 채 못다 이룬 꿈을 비통해 하면서 자신의 저술이라도 남기고 싶어 했던 말하자면 우리와 똑 같은 속물 인간에 가까웠다. 그런 너무나도 인간적인 모습에 연민이 느껴지기도 한다. 어려운 수사로 나열된 골치 아픈 금서가 아니라 한인간의 적나라한 실체를 다 보여주고 떠난 자유인으로 접근할 때 군주론은 참맛이 있다.

우리는 지금 보수와 진보의 경계를 요구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대립된 진영의 정체성 속에서 매 순간 무수한 자기소외를 느낄 것이다. 다른 생각이 존중되고 공존이 강물처럼 흐르는 세월을 갈망하지만 현실은 녹녹치 않다. 진정한 시민적 자유를 위한 새로운 정치적 상상력을 마키아벨리에서 조금이라도 얻어 간다면 다행한 일이다.

군주론에서 지도자는 비르투(능력) 포르투나(행운) 네체시타(시대성)가 겸비되어야 한다고 확신했다. 마키아벨리가 살아서 관찰했다면 지금 우리나라의 통치자는 과연 어느 쪽에서 더 많은 점수를 따냈을까.

김경한 컨슈머타임스 발행인 justin747@cs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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