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보도자료에 '우리말 멸종'(?) 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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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보도자료에 '우리말 멸종'(?) 유감
  • 한행우 기자 hnsh21@cstimes.com
  • 기사출고 2013년 06월 24일 08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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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슈머타임스 한행우 기자] 한글날이 공휴일로 돌아왔다.

어려운 경제 여건 등을 이유로 제외된 지 22년 만에 다시 '빨간 날'로 지정된 것이다. 글쓰기를 업으로 삼는 기자의 입장에서 두 팔 벌려 환영할 일이다.

다만 익숙한 공기와 물의 소중함을 모르듯 우리말의 위상에도 '빨간 불'이 들어온 지 오래라 한켠으론 씁쓸하다.

"'아점'은 늦잠을 자고 일어나 끼니를 때우는 것이고 '브런치'는 도심의 레스토랑에서 여유로운 대화를 즐기며 먹는 것"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같은 의미임에도 영어를 훨씬 세련되고 품격 있게 여기는 비틀린 인식을 풍자한 대목이다.

선망의 대상으로 여겨지면서 영어는 우리의 일상 속으로 깊이 파고들었다. 특히 의류업체, 화장품업체에서 보내오는 보도자료를 보고 있으면 번역기를 돌리고 싶어질 정도다.

"젤리 쿠션 타입 아이섀도와 크레용 타입의 립 컬러, 하이라이터 및 섀딩용 페이스 파우더, 네온 아쿠아 컬러의 네일을 선보인다"라거나 "서머 머스트 해브 아이템인 스타일리쉬 리조트 룩에 걸맞은 플라워 프린티드 스커트"같은 불친절한 문장들 틈에서 우리말은 멸종위기다.

기사는 우리말로 바로잡아 쓰는 게 원칙. 하지만 '립 컬러'를 '입술용 제품'으로 섣불리 바꿀 수도 없는 노릇이다. 쓰면서도 어색한 건 물론 읽는 사람도 의아하게 만들 '발번역'이다. 그만큼 패션업계 전반에서 영어는 익숙하게 통용된다.

영어교육에 열을 올린 결과 이제는 필수교양이 됐다. 대신 점차 모국어의 참된 맛과 결을 살리는 일에는 소홀하게 됐다.

국립국어원은 지난 2004년부터 지금까지 '우리말 다듬기'를 진행해오고 있다. '싱어송라이터'는 '자작가수'로, '피팅 모델'은 '맵시도우미'로 '시스루'는 '비침옷'으로 순화하는 식이다.

아직 입에 착 달라붙지는 않지만 공모를 통해 이런 시도를 꾸준히 하다 보면 화장품 업계나 패션업계에서 남발하는 외국어·외래어도 고운 우리말로의 대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언어는 세상을 보는 창이다. 우리는 모국어를 통해 현상을 본다.

'는개'라는 말이 있다. 안개보다는 조금 굵고 이슬비보다는 가는 비를 뜻하는 순 우리말이다. 이 단어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안개비가 오는 날'과 '이슬비가 오는 날'이 있다. 하지만 이 단어를 알고나면 그 중간 지점인 '는개가 오는 날'이 생긴다.

세상을 헤아리는 폭이 그만큼 늘어나는 것이다.

우리말에도 아직 우리가 알지 못하는, 더 배워야 할 부분들이 무궁무진하게 남아있다. 외국어를 섞어 쓰는 것보다 우리말의 장·단음만 정확히 발음해도 마치 아나운서처럼 '있어' 보인다.

다가올 한글날은 온전히 우리 말과 글의 아름다움을 헤아리는 시간이길 바란다. 더불어 화장품, 의류업체들이 보내오는 자료에도 우리말이 좀 더 늘어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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